
정답서희는 고려가 거란에 군사적 적대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소손녕이 철군할 것으로 보았다는 설명입니다.
핵심 개념
거란의 1차 침입과 서희의 외교 담판 — 사실 관계 대조하기
이 문항은 지문에 서술된 역사적 사실과 선지를 하나씩 대조하는 내용 일치 유형입니다. 지문의 흐름은 ①979년 송 태종의 원병 요청을 고려가 거절함 → ②거란이 압록강 하류 여진족 땅을 여러 차례 침범해 진군로를 확보함 → ③993년 소손녕이 침입해 '고구려 옛 땅' 명분을 내세운 서신을 보냄 → ④서희는 이를 핑계로 보고, 고려가 거란을 치지 않겠다는 언질만 주면 철군할 것이라 판단함 → ⑤안융진 패배 후 소손녕이 협상을 요청하고, 서희가 여진족 땅 지배 묵인을 요구해 관철함 → ⑥고려가 그 지역에 강동 6주를 설치함입니다. 특히 '누가 무엇을 요구·주장했는가'와 '강동 6주를 누가 두었는가'가 선지 함정으로 쓰이므로 주체를 정확히 짚어야 합니다.
선지별 해설
①소손녕이 내세운 명분은 '고구려 옛 땅은 거란의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여진족을 고려의 백성이라고 주장했다는 내용은 지문에 없으므로 부합하지 않습니다.
②여진족은 발해 멸망 이후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독자적 세력이었고, 오히려 거란의 침범을 당한 쪽입니다. 거란과 함께 고려를 공격했다는 서술은 없습니다.
③강동 6주는 담판 이후 고려가 북쪽 국경 너머로 병력을 보내 영토를 넓힌 뒤 스스로 설치한 것입니다. 소손녕이 강동 6주를 두어 고려에 넘겼다는 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④고려는 979년 송 태종의 원병 요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송과 군사동맹을 맺고 거란을 공격했다는 내용은 지문의 서술과 정반대입니다.
⑤서희는 소손녕의 서신을 핑계로 보고, 고려가 병력을 동원해 거란을 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언질을 주면 소손녕이 철군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문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정답해주 앞바다에서 조선군과 싸운 왜구가 요동반도로 북상한 뒤에 이종무의 군대가 대마도로 건너갔다는 설명입니다.
핵심 개념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 사건의 시간 순서와 주체 확인
세종 즉위 이듬해에 벌어진 대마도 정벌(기해동정)의 경과를 서술한 지문으로, 사건의 순서와 행위 주체를 정확히 짚어야 풀리는 내용 추론 유형입니다. 흐름은 ①5월 대마도 왜구가 충청도 해안을 노략하고 해주 앞바다에서 조선군과 교전한 뒤 요동반도로 북상 → ②상왕 태종이 이종무에게 정벌을 명함 → ③6월 20일 두지포 상륙, 대마도주에게 귀순 요구 → ④반응이 없자 니로에 상륙했다가 매복에 크게 패배 → ⑤군사를 거두어 거제도 견내량으로 귀환 → ⑥요동에서 왜구가 크게 패해 300여 명만 남았다는 보고 → ⑦태종이 출진 명령을 취소하고 사신을 보내 귀순을 받아냄입니다. 명령의 주체가 세종이 아니라 상왕 태종이라는 점, 패전 장소가 견내량이 아니라 니로라는 점이 핵심 함정입니다.
선지별 해설
①왜구가 해주 앞바다 교전 후 요동반도로 북상했고, 태종은 그 왜구가 돌아오기 전에 정벌하라고 명했으므로 이종무의 도해는 북상 이후입니다. 시간 순서가 지문과 일치합니다.
②명의 군대가 대마도 정벌에 참여했다는 서술은 없습니다. 왜구가 요동반도에 상륙했다가 크게 패했다는 내용이 있을 뿐, 명이 조선과 함께 대마도로 간 것은 아닙니다.
③이종무는 정벌군의 지휘관이었고, 귀순을 요구하는 사신으로는 태종이 측근 중 적임자를 따로 골라 보냈습니다. 이종무가 사절단에 포함되어 여러 차례 방문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④정벌을 명한 사람이 상왕 태종이고 실제로 정벌은 실행되었습니다. 세종이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서술은 지문 어디에도 없습니다.
⑤조선군이 대마도주를 사로잡기 위해 상륙했다가 매복에 패한 곳은 '니로'입니다. 견내량은 패전 후 군사를 거두어 돌아온 거제도의 지점이므로 장소가 뒤바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