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답고조선은 8조의 법을 두었으며 그중 세 조항만 오늘날까지 전해집니다.
핵심 개념
『위략』의 칭왕 기사와 고조선
제시문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인용된 『위략』의 기록입니다. 주나라가 쇠약해지고 연나라가 스스로 왕을 칭하며 동쪽으로 침략하려 하자, 조선후(朝鮮侯) 역시 스스로 왕을 칭하고 연을 치려다가 대부(大夫) 예(禮)의 간언으로 그만두었다는 내용이므로 ㉠은 고조선입니다. 기원전 4세기경 고조선은 연과 맞설 만큼 성장하여 '후'에서 '왕'으로 칭왕하였고, 대부·박사 같은 관직을 두어 국가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이후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입으로 서쪽 2천여 리 땅을 잃었고, 사회 모습은 8조법(범금 8조)으로 전해집니다.
선지별 해설
①전연(前燕)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은 나라는 고구려입니다. 342년 고국원왕 때 전연 모용황의 침입으로 수도 환도성이 함락되고 미천왕릉이 훼손되었습니다. 고조선은 전연이 등장하기 수백 년 전에 이미 멸망(기원전 108년)하였으므로 관련이 없습니다.
②매년 10월에 무천(舞天)이라는 제천행사를 연 나라는 동예입니다. 부여는 12월의 영고, 고구려는 10월의 동맹, 삼한은 5월·10월의 계절제를 지냈습니다. 고조선의 제천행사는 기록으로 전하지 않습니다.
③박·석·김 세 성씨가 왕위를 교대로 이은 것은 신라 초기의 특징입니다. 신라는 이후 내물마립간 때부터 김씨가 왕위를 독점 세습하였습니다. 고조선은 단군조선 이후 위만조선까지 이러한 3성 교대 계승 기록이 없습니다.
④고조선에는 8조의 법이 있었고, 『한서』 지리지에 세 조항만 전합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이고, 남을 다치게 한 자는 곡식으로 갚으며,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되 용서받으려면 50만 전을 내야 한다는 내용으로, 생명·노동력·사유재산을 중시한 계급 사회였음을 보여줍니다.

정답창덕궁은 태종이 세웠지만 창경궁은 성종이 건립한 궁궐이므로 옳지 않은 설명입니다.
핵심 개념
조선 초기 국왕별 업적 — 태조·태종·세종·세조
조선 초기 국왕의 업적을 왕별로 구분해 묻는 문항입니다. 태조는 한양 천도와 한성부 개칭·경복궁 창건으로 새 왕조의 터를 닦았고, 태종은 6조 직계제·호패법·사병 혁파로 왕권을 강화하며 이궁으로 창덕궁을 세웠습니다. 세종은 집현전을 중심으로 사가독서제·훈민정음 등 문화 사업을 폈고, 세조는 6조 직계제 부활과 함께 간경도감을 두어 불교를 후원했습니다. 궁궐 창건 시기는 특히 자주 함정으로 나오는데, 창덕궁(태종)과 창경궁(성종)을 반드시 갈라서 기억해야 합니다.
선지별 해설
①태조는 1394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였고, 이듬해인 1395년 한양부를 한성부로 고쳐 수도의 행정 기구로 삼았습니다. 이 시기에 경복궁과 종묘·사직도 함께 조성되었으므로 맞는 설명입니다.
②창덕궁은 태종이 1405년 이궁으로 세운 것이 맞지만, 창경궁은 태종과 무관합니다. 창경궁은 성종이 1483년 대비들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옛 수강궁 터를 크게 넓혀 지은 궁궐이므로, 두 궁을 모두 태종의 업적으로 묶은 이 선지가 옳지 않습니다.
③세종은 1426년 집현전 학자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와 연구에 전념하게 하는 사가독서제를 시행하여 학문 활동을 장려하였습니다. 이 제도는 뒤에 성종 대의 독서당(호당)으로 이어졌으므로 맞는 설명입니다.
④세조는 1461년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법화경」·「능엄경」 등 불경을 한글로 번역(언해)하고 간행하게 하였습니다. 원각사지 십층석탑 건립과 함께 세조의 대표적인 불교 후원 정책이므로 맞는 설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