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답통일신라에서 촌의 행정은 토착 세력인 촌주가 담당하였다는 설명이 옳습니다.
핵심 개념
시대별 지방 행정 제도 — 촌주·사심관·면리제
각 시대의 지방 통치 방식을 구분하는 문항입니다. 통일신라는 9주 5소경 체제 아래 촌을 기본 단위로 삼아 토착 세력인 촌주에게 촌의 행정 실무를 맡겼고, 발해는 5경 15부 62주 체제로 지방을 편성하되 말단인 촌락은 토착 수령이 다스렸습니다. 고려는 주현보다 속현이 많아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했고 향·부곡·소라는 특수 행정 구역이 존재했으며, 사심관 제도로 지방 세력을 견제하였습니다. 조선에 이르러서야 전국 330여 개 모든 군현에 수령이 파견되고 면리제가 정비되었습니다. 제도의 '주인'이 되는 시대를 서로 바꿔 놓는 것이 이 유형의 전형적인 함정입니다.
선지별 해설
①통일신라는 촌을 지방 행정의 말단 단위로 삼고, 지방관이 아니라 그 지역 토착 세력인 촌주에게 촌의 행정을 맡겼습니다. 신라 촌락 문서(민정 문서)도 촌주가 3년마다 작성한 것으로 이해되므로 옳은 설명입니다.
②전국 330여 개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한 것은 조선의 특징입니다. 발해는 5경 15부 62주 체제였고 말단 촌락은 토착 수령이 지배하였으므로 시대가 맞지 않습니다.
③면리제가 촌락 지배 방식으로 확립된 것은 조선입니다. 고려의 촌락 지배는 향·부곡·소와 속현이 남아 있는 형태였고, 향리가 실질적인 행정을 담당하였습니다.
④사심관은 고려 태조가 지방 호족을 통제하기 위해 마련한 제도로, 조선의 제도가 아닙니다. 조선은 유향소와 경재소를 통해 향리와 향촌 세력을 견제하였습니다.

정답담판의 결과로 서희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강동 6주 지역을 경략한 것이 옳은 설명입니다.
핵심 개념
서희의 외교 담판과 강동 6주 획득
제시된 대화는 993년(성종 12) 거란의 1차 침입 때 소손녕(갑)과 서희(을)가 벌인 외교 담판입니다. 소손녕이 고려는 신라를 계승했으니 고구려 땅은 거란 것이라고 주장하자, 서희는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한 사실을 들어 고구려 계승국임을 논박하였습니다. 그 결과 고려는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과 교류한다는 조건으로 압록강 동쪽의 여진을 몰아내고 흥화진·용주·통주·철주·구주·곽주의 강동 6주를 확보하였습니다. 담판 '이후' 서희 본인의 활동을 묻고 있으므로, 거란과의 다른 전투나 여진 관련 사건과 시기를 구분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선지별 해설
①천리장성은 거란의 3차 침입이 끝난 뒤인 1033년(덕종)부터 1044년(정종)까지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 도련포까지 쌓은 것으로, 서희가 아니라 유소 등이 주도하였습니다.
②서희는 담판 이후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 동쪽의 여진을 축출하면서 흥화진 등 강동 6주에 성을 쌓아 영토를 확보하였습니다. 담판 이후 서희 본인의 활동으로 옳습니다.
③귀주 대첩은 1019년 거란의 3차 침입 때 강감찬이 거둔 승리로, 993년 담판의 주역인 서희의 활동이 아닙니다.
④동북 9성 설치는 1107년 예종 때 윤관이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한 뒤의 일로, 시기와 인물이 모두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