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답두 사람은 6두품이므로 아찬 이상 오를 수 없어, 관등 승진에서 중위제(重位制)를 적용받았습니다.
핵심 개념
신라 6두품 - 설총과 최치원
제시문의 ㉠은 신문왕에게 「화왕계」를 지어 올린 설총이고, ㉡은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건의한 최치원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신라의 6두품 출신 지식인입니다.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은 '득난(得難)'이라 불릴 만큼 높은 신분이었지만, 진골이 독점한 정치 권력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었습니다. 관등은 제6관등 아찬까지만 오를 수 있었고 중앙 관부의 장관직(令)에도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학문과 종교, 문장 실력을 무기로 국왕의 조언자 역할을 하거나 골품제 자체를 비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6두품의 신분적 한계를 묻는 문항이므로 진골에게만 해당하는 특권과 구별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선지별 해설
①왕이 될 수 있는 신분은 성골과 진골뿐입니다. 6두품인 설총과 최치원은 아무리 학식이 뛰어나도 왕위에 오를 수 없었으므로 공통 특징이 될 수 없습니다.
②자색(紫色) 공복은 제1관등 이벌찬부터 제5관등 대아찬까지 착용하는 것으로 진골만 가능했습니다. 6두품은 아찬이 상한이어서 그 아래인 비색(緋色) 공복까지만 입을 수 있었습니다.
③집사부 중시(시중), 병부령 등 중앙 관부의 최고 책임자인 영(令)은 진골만이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6두품은 차관급인 시랑·경(卿)에 머물렀으므로 옳지 않습니다.
④6두품은 제6관등 아찬이 승진 한계였기 때문에, 그 불만을 달래려고 아찬을 중아찬부터 사중아찬까지 여러 등급으로 나눈 중위제를 두었습니다. 설총과 최치원 모두 여기에 해당하므로 정답입니다.

정답소수림왕의 태학 설립(ㄱ)과 광개토대왕의 왜 격퇴(ㄹ)가 (가)와 (다) 사이에 해당합니다.
핵심 개념
고구려의 발전 과정 - 미천왕에서 장수왕까지
(가)의 낙랑군 축출은 미천왕 대인 313년의 일이고, (다)의 평양 천도(427)와 백제 한성 함락(475)은 장수왕 대의 일입니다. 따라서 (나)에는 4세기 초부터 5세기 초 사이, 즉 고국원왕·소수림왕·광개토대왕 시기의 사실이 들어가야 합니다. 소수림왕은 372년 불교 수용과 태학 설립, 373년 율령 반포로 중앙집권 체제를 정비했고, 광개토대왕은 400년 신라의 요청을 받아 5만 군대를 보내 왜를 격퇴하며 한반도 남부까지 영향력을 넓혔습니다. 고구려사는 왕별 업적과 연대를 순서로 묶어 외워 두어야 이런 시기 배열 문항을 안정적으로 풀 수 있습니다.
선지별 해설
①ㄱ 태학 설립은 소수림왕(372년)으로 맞지만, ㄴ 진대법은 2세기 고국천왕이 을파소의 건의로 실시한 것이라 (가)의 낙랑군 축출(313년)보다 앞섭니다.
②ㄱ 태학 설립은 소수림왕 372년, ㄹ 신라를 도와 왜를 격퇴한 것은 광개토대왕 400년의 일로 모두 313년과 427년 사이에 들어갑니다. 따라서 정답입니다.
③ㄴ 진대법은 고국천왕 대(194년)로 시기가 너무 이르고, ㄷ 천리장성은 영류왕 때 착공해 보장왕 때 완성(631~647년)한 것이라 (다)보다 훨씬 뒤입니다.
④ㄹ 왜 격퇴는 맞지만 ㄷ 천리장성 축조는 7세기 당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므로, 5세기 장수왕의 평양 천도보다 뒤에 놓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