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답전차 노선 부설에 부족했던 공사비를 미국인 콜브란이 빌려주었다는 설명이 지문과 부합합니다.
핵심 개념
한성전기회사의 설립과 전차 노선 부설, 한미전기회사로의 재편
이 글은 고종이 홍릉 참배의 불편을 계기로 전차 사업에 나선 과정을 시간 순으로 서술합니다. 개항 직후 들어와 경인철도회사를 운영하던 미국인 콜브란이 서대문~청량리 전차 부설을 주장했고, 고종은 황실이 직접 나서는 대신 민간인 김두승·이근배로 하여금 농상공부에 청원서를 내도록 권유해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되었습니다. 자본금은 고종이 단독 출자했고, 공사비가 모자라자 회사 재산을 담보로 콜브란에게서 부족분을 빌렸으며, 1904년 채무 정리 과정에서 콜브란이 대주주가 되면서 한미전기회사로 재편되었습니다. 각 선지에서 '누가 설립하고 출자하고 빌려주었는가'를 지문과 대조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선지별 해설
①콜브란은 개항 직후 들어와 이미 경인철도회사를 운영하고 있었고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뒤에 한성전기회사가 세워졌으므로, 설립 순서가 반대입니다.
②당초 계획은 남대문~청량리였는데 경인철도 종착역이 서대문역으로 정해지면서 서대문~청량리로 변경되었으므로,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③전차 노선 부설에 필요한 공사비가 부족해지자 회사 재산을 담보로 콜브란으로부터 부족분을 빌려 공사를 마무리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④고종은 황실이 직접 회사를 세우는 대신 민간인 김두승·이근배가 청원하도록 권유했고, 농상공부는 청원을 받아 허가한 관청이었을 뿐입니다.
⑤한성전기회사 자본금은 고종이 단독 출자했고, 한미전기회사는 고종과 콜브란이 대주주가 되어 재편한 회사이므로 두 사람의 출자로 설립된 것이 아닙니다.

정답포쇄가 3년마다 정기 실시되고 포쇄 때마다 형지안이 작성되었으므로, 포쇄형지안도 3년마다 정기적으로 작성되었다는 설명이 옳습니다.
핵심 개념
조선 사고(史庫)의 포쇄와 겸직사관 파견 논쟁
사고는 실록 등 국가의 귀중한 문헌을 보관하던 곳이라 원칙상 중앙에서 파견된 사관만 열 수 있었으나, 사관 수가 적어 중종 때 중앙과 지방에 겸직사관을 여러 명 두었습니다. 책을 꺼내 바람과 햇볕에 쬐어 해충·곰팡이를 막는 포쇄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실시되었고, 포쇄 때는 반드시 포쇄형지안이 작성되어 책임자 이름, 꺼낸 도서 목록, 사용한 약품 등을 기록했습니다. 중종 14년 중종은 사관 파견에 비용이 많이 든다며 지방 겸직사관에게 포쇄를 맡기자고 했고, 춘추관은 문헌 보관을 가벼이 여기는 계기가 된다며 반대했으며, 중종 23년에는 결국 사관 파견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선지별 해설
①겸직사관은 사관 수가 부족해 사관을 보좌하려고 둔 자리이며, 포쇄 전문가 중에서 선발했다거나 효율성이 높았다는 서술은 지문에 없습니다.
②중종이 든 폐단은 사관을 보내는 데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었고, 문헌이 훼손된다는 폐단을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③춘추관은 겸직사관에게 포쇄를 맡기는 데 반대했을 뿐, 겸직사관 제도 자체의 폐지를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④사고 도서의 포쇄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실시되었고 포쇄 때는 반드시 포쇄형지안이 작성되었으므로, 형지안 역시 3년 주기로 작성된 셈입니다.
⑤약품은 포쇄에 사용한 항목으로 형지안에 기록되었을 뿐이며, 사고 안에 약품을 살포했다는 내용은 지문에서 확인되지 않습니다.